영릉(寧陵)을 참배하기 위해 임금이 걸었던 거둥길 거둥길은 왕이 선대왕의 능에서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오가던 능행길을 말합니다 여주에는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후손에게 남긴 훌륭한 업적들과 그 업적의 바탕이 된 애민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효종대왕의 북벌에 대한 의지를 느껴볼 수 있는 구간입니다 효종대왕을 참배하기 위해 수많은 임금이 걸었던 길을 생각하며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이인손의 묘에 얽힌 이야기 이인손이 죽자 후손들은 좋은 자리를 골라 묘를 쓰게 되었다 이때 산소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봉분을 만들지 말것이며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산이 불어나고 자손들이 번창하자 이인손의 후손들은 지관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묘의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때마침 조정에서는 영릉 천장론이 대두되어 각처에서 지관을 풀어 명당을 찾고 있었는데 한 지관이 명당을 찾아 능서면 왕대리에 오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사방이 어둑해 지면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지관은 나무 밑에서 젖은 옷을 걱정하며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소나기가 지나가고 주위가 밝아지자 건너편에 1기의 분묘를 바라보게 되었다 무심결에 분묘를 바라보는 순간 지과는 몇달을 두고 찾아헤매던 명당자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주변 산세와 지맥 등을 다시한번 따져보니 앞에는 북성산이 신하부 복형의 모습으로 엎디어 있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있는 것이 모란반개형이요 회룡고조형의 대명당 자리였다 이에 지관은 지도에다 명당의 위치와 방위를 표시한 다음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경기도 광주 대모산(大母山: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세종대왕릉이 옮겨오게 되었다 한편 후손들은 이인손의 묘를 옮기기 위해 산소를 파헤치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있는 비기가 나왔는데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연이 떨어진 자리에 이장하라"고 적혀 있었다 비기의 예언대로 연을 높이 날린 후 연줄을 끊으니 북성산 기슭의 연주리에 떨어졌다 연주리는 연줄이 떨어진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고 지금의 신지리이다
충희공 이인손 묘(忠僖公.李仁孫 墓) 이인손(1395~1463)은 조선 초기 세종과 세조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중윤 호는 풍애이다 할아버지는 둔촌공 이집이고 아버지는 형조참의와 보문각직제학을 지낸 이지직 이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극배는 영의정 광릉부원군 차남 이극감은 형조판서 광성군 삼남 이극증은 판중추부사 광천군 사남 이극돈은 의정부좌찬성 광원군 오남 이극군은 좌의정 광남군 으로 모두 봉군 되었다 이인손은 141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사헌부감찰을 거쳐 1429년에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좌랑 예조좌랑 예문관직제학 집의 군자감 예조참의 경상도관찰사 상주목사 형조참의 대사헌 한성부윤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에 한성부윤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4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후 호조판서에 승진되었고 1455년 세조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다 이후 판중추부사와 우찬성을 거쳐 1459년 우의정에 오른뒤
잉령치사(종신토록 이전과 동일하게 대우)하였다 시호는 충희(忠僖)
이곳에서 물소리길은 산 방향으로 올라가지만
우리가 걷는 길은 약간 돌아서 물소리길과 합쳐진다
이곳에 스탬프함이 있다
대륙으로 향한 북벌의 의지 효종대왕 이야기 1636년(인조14)12월 청태종이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불과 5일 만에 한양에 이르렀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1월30일 인조는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며 항복했습니다 삼배구고두란 여진족이 천자를 배알할 때 행하는 의식이었는데 한번 절 할 때마다 머리를 세번 땅에 부딪치는 것을 세번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조가 성의없이 땅에 머리를 부딪치자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계속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땅바닥에 수십번 머리를 부딪쳤고 이로 인하여 이마에 피가 났으며 흘러내린 피가 용포를 적셨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 치욕적인 항복 직후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하여
죽은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이가 조선 17대 임금 효종입니다
우리가 건너갈 다리
하리보도교
강한사(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조선중기의 학자이며 명신인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조 9년(1785)왕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오셨다가 김양행 등 유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大老祠) 사액(임금이 사당,서원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액자를 내리는 일을 이르던 말)하였으나 고종 10년(1873)10월에 강한사라 개칭하였다 사당의 방향은 서쪽에 위치한 효종대왕릉 을 향하고 있다 우암은 인조11년(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경릉참봉을 거쳐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며 후일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9년(1658년)이조판서에 승진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강한사(江漢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 강한사는 송시열의 듯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정조가 내탕금을 하사하여 지은 사당이다 송시열은 이이의 학통을 계승해 일생을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 대학자로서 성균관 문묘에 모셔져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효종을 도와 불벌 계획을 추진했으나 효종이 사망하자 중지되었고 이후 서인의 지도자로서 효종의 배향공신이 되었다 정조는 정조9년(1785년)에 송시열이 효종을 도운 것이 대로(大老)의 표본인 강태공과 같다하여 사당이름을 대로사 라 했다 그 후 고종 8년(1871년)에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거할 때에 송시열을 모신 44개의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대로사만 "강한사" 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남게 되었다 강한사의 구조는 사당,강당,비각,제실,기타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 간단하지만 일반 향교나 서원과 달리 배치가 동서를 축으로 서쪽을 바라보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송시열이 영릉(효종의 능)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출입문 역시 송시열이 영릉의 잣나무들을 바라보며 애통해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강당인 첨백당과 정조가 편액을 내린 이유와 목적을 친필로 새긴 비석 대로사비가 있다 대로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 면적 14평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강당은 엎면 5칸 옆면 3칸 면적 30평이다 배향 공신 : 고려와 조선 시대 종묘에 신주를 모신 공신 대로 :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어진 노인
이제 대로사를 나와 여주역으로 간다~딱 반 걸었네
세종대왕의 탄생 태몽)어느 날 새벽 어머니 원경황후 꿈속에 큰 황소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뿔 사이에 낀 활활 타오르는 붉은 해를 북악산 밑으로 떨어트려 온 장 안을 다 태워 버릴 찰나 붉은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는 그 해를 꿀꺽 삼키고 자신의 품으로 쏙 들어와 안겼다고 한다 이런한 태몽으로 탄생하신 분이 바로 세종대왕이시다
돌잔치) 커다란 돌잔치 상 위에 떡과 과일 쌀 실타래 돈 책 붓 화살 등을 올려놓고 그 아기의 장래를 점쳐 보는 흥미로운 돌잡이 행사에서 세종은 커다란 책을 집어 안으며 땅바닥에 앉아 가만히 책장을 넘기었다고 한다
소년 세종)원칙중시 충녕 왕자가 되어 어느덧 다섯 살이 되었다 그 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해서 나라에서는 금주령(禁酒令) 까지 내려 졌으나 태종은 속상하여 술을 몇 잔 마시는데 어린 충녕 왕자가 나타나 나라에서 금한 술을 어찌 아바마마는 드시고 계시냐고 여쭈었다 이에 태종임금이 뉘우치고 감동하여 이튿날 아침 조례에서자신도 금주를 선포했다고 한다
책 사랑) 어린 충녕 왕자가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자 염려가 된 태종임금은 병이 나을 때까지만 이라도 방에 있는 책을 다른 곳으로 옮겨 책을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자는 병풍 틈에 끼어 있던 책 한 권을 발견하고는 읽기 시작했고어느덧 그 책은 다 해지고 책에 있던 글을 전부 외워 버렸다한다
총명함) 어는 날 태종임금은 어린 충녕 왕자를 놀려먹을 요량으로 커다란 대궐 지붕의 똑같은 모양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기왓골을 세어보라 명하였다 이에 충녕 왕자는 며칠 후 비가 내리고 날이 밝아지자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낙숫물로인해 땅바닥에 패인 빗물자국을 세어 그 숫자를 고하였다고 한다 세자 세종의 총명함이 돋보이는 일화로 전해 내려온다
한글시장을 돌아나와 이마트방향으로 간다
CU왼쪽 옆길로 방향을 잡아 간다
오른쪽 횡단보도를 건너서 화살표 방향으로
CU 옆 여주향고 방향으로
설명)여주향교 향교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지방에설립한 교윤 기관이다 여기에 공자를 비롯해 정몽주,이황,이이,등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현을 모시는 제향 기능도 겸했다 향교는 제향 공간과 교육을 위한 강학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주 향교는 고려 말 이곡이 여러 곳에 향교를 세우면서 상동 마암 근처에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숙종 11년(1685)에 홍문의 잣나무 고개 부근에 다시 지었으나 그 이후 공교롭게도 마을 주민들이 자주 질병을 앓게 되자 풍수지리를 따져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18년,1976년,1980년,1985년에 고쳐 지었다 이 향교는 앞쪽 낮은 곳에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족 높은 곳에 제향을 지내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공포가 익공 양식으로 되어 있어 단아하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캉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도 동무 서무 내삼문 등의 건물이 있다 여주향교는 전형적인 배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 규모도 크지 ㅇ낳다 향교의 부속 재료 형태와 모양새가 지역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는길에 적당한 자리가 없어 여기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쉬어간다
역사문화도시의 향기)여주역 역(驛)이야기 역 도자기를 빚다 옛 여주역은 1931년12월 수려선 개통과 함께 지금의 여주시 홍문동에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72년 4월 수려선과 함께 폐지되었던 역은 2016년 9월 24일 경강선 개통과 함께 여주시 교동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새로 건설된 여주역은 지역의 특성을 살려 도자기와 도자기를 빛는 사람의 손길을 형상화하여 문화도시의 정체성을 역사에 담았다 또한 한글을 소재로 한 역사 내부 장식은 세종대왕이 잠들어계신 지역의 역사성을 반영하고 있다 인근에 영릉을 비롯해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 등 풍부한 역사문화자원이 있다
지역 이야기~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천하의 명당 여주는 중부지방의 동맥인 남한강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고장이며 서울에서 멀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풍경과 볼거리가 많은 나들이 장소이다 남한강을 따라 옛 황포돛배를 타고 천년고찰 신륵사 앞에서 노을과 어우러지는 강의 아름다움에 바져드는 것은 여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또한 한국 도자산업의 중심인 여주는 이천 광주와 더불어 도자기와 좋은 쌀이 손꼽히는 도시이다 예로부터 많은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 천하의 명당으로 꼽혔던 곳으로 이를 증명하듯 세종대왕과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의 능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