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둔도예촌역~사기막골도예천~설봉산성~설봉공원~이천종합터미널~애련정~부발역
스탬프 : 설봉공원 안내센터 앞
갈때 : 원흥역(3호선)~신사역(신분당선)~판교(경강선)~신둔도예촌역
올때 : 부발역(경강선)판교(신분당선)~신사(3호선)~원흥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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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섭대천(利涉大川)의 이천, 삼국시대 격전장의 역사를 담은 길
남천주길은 이천의 유래를 찾는 여정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이천 일대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심했습니다
우선 고구려 때 남천현(南川縣)이 되었으며
568년에는 신라에서 남천주로 명명하고, 행정구역화 하였습니다고려 태조인 왕건은 후백제 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지금의 복하천(福河川)에 이르렀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천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왕건은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글귀에서 내려주었고
여기서 이천이라는 지역명이 비롯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설봉산의 수많은 문화유산과 이천 지역과 관련된 이야기에 주목하며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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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오른쪽 길로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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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산으로 가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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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항아리도 담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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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을 눈앞에 두고 우리는~한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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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이라 그런지 도자기골목이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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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설봉산방향 숲길로 들어선다~엄청 가파른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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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산 정상에서 우리가 지나갈 설봉공원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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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대~산봉에 어떤 경축이나 신호로 놓는 불
난리를 알리는 불로써 초저녁에 올리는데
평상시에는 한번, 적이 나타나면 2번, 국경에 접근 3번, 침범 4번, 접전 5번
낮에는 토끼똥을 태워 연기를 사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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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산성~사적 제423호(소재지:경기도 이천시 사음동 산24일원)
설봉산성은 관고리성지 또는 무악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설봉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설봉산성은 관고동의 일명 기치미 고개에서 중일리에 이르는 산줄기의 연봉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과 남쪽은 물론 주변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079m이고 삼국시대의 성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산성으로
전면을 다듬은 화강암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쐐기돌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문은 어굿문 형태로된 서문과 북문 동문이 있으며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돌출시킨 치성은 4개가 확인되고 있다
장대는 성내의 가장 높고 지휘 관측이 용이한 칼바위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노출된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 정도이다
우물은 동문지 뒤편 평탄한 곳에 1개소가 있으며 물통로는 북쪽과 동쪽에 각각 1개씩 설치하였다
단국대학교에 의한 발굴 조사결과 칼바의 부근의 토광과 서문지 하부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백제 석성일 가능성에 대한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반면 동문지 상단 및 성내 전역에서는 단각고배류와 인화문토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함통 6년(865)명의 벼루가 출토되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에 축성되어 9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부성은 규모가 각각 532m와 362m인 석축성으로서 성내에 건물지와 치성 문지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삼국~통일신라 기와 토기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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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안내소 앞에서 스탬프 찍고~형제바위를 찾아간다
문화재인증도 받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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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서원을 지나~ 형제바위 먼저 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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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바위 가는길 입구~더 위쪽에도 가는길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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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형제바위 전설~아주 오랜 옛날 가난한 집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다가 팔아
생계를 유지 하며 살아가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삼형제는 우애와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 지방에 효자 아들로 이름이 널이 알려져 있었다
어느날 설봉산으로 나무하러 갔던 삼형제가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아 속태우던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산으로 가게 되었고 그런줄도 모르는 아들은 나무를 한짐씩 잔뜩하여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안계시자 어머니를 찾아 온 산을 헤메고 있을때 어디선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
삼형제가 쏜살같이 달려가보니 수십길이 넘는 낭떠러지 밑에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삼형제 아들이 똑같이 뛰어 내렸는데 그 순간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또한 오랜 옛날 홀어머니 밑에 삼형제가 있었는데 3년 기한인 병졸로 모두 뽑혀가게 되었다
아들 셋을 의지하며 살던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함을 빌었으나 약속한 3년이 지나도 아들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혼자서 생계를 이어가던 홀어머니는 그리던 아들을 보지 못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졸의 의무를 다한 삼형제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머니의 무덤에 엎드려 명복을 빌며 일어날줄 몰랐고 그대로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전설이지만 두 전설 모두가 효심가득한 삼형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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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서원(이천시 향토유적 제18호) 설봉서원절목(이천시 향토유물제19호)
유학의 진흥과 장학을 목적으로 창건된 설봉서원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서악서원에 이어
조선조 명종 19년(1564)년 이천부사였던 정현이 유림의 공의에 따라 지금의 이천시 안홍지 주변에 세운 서원이다
선조때 임진왜란(1592)전 설봉산 공원입구 아래로 옮기면서 설봉서원으로 명명되었다
이 서원에는 원래 복천 서희 선생을 모시다가 이어 율정 이관의 선생 모재 김안국 선생을
함께 배향하여 삼현사로 불리우다가 철종 8년(1857)년 소요재 최숙정 선생을 함께 배향하여
사현이 봉안 되었으며 유림들이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학문을 강론하면서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던 사학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고종 8년(1871)년에 300여 년 동안이나 향사(享祀 죽은이를 추모하는 의식)해온서원이
안타깝게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
그러나 1990년경부터 서원복원에대한 논의가 진전되어
2004년6월 사단법인 등기를 설정하고 건축공정을 추진하였다
2005년 12월 현 위치에 기공을 하고 2006년 12월에 완공되어 2007년 4월13일에 준공식을 가짐으로써
철폐된지 136년여 만에 이전 복원이 완료되었고 2021년10월에 설봉서원 이사회의 결의로
해화당 서선 선생을 함께 배향하여 오형을 봉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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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서원을 둘러보고 설봉공원으로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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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설봉공원을 지나 애련정으로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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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정에서 문화재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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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정(愛蓮亭) 이천시 향토유적 제15호)
이천읍지(利川邑誌)에 의하면 객사(客舍)남쪽에 정자(停子) 언제 창건(創建)되었는지는 모르나
세종10년(1428)에 중건하고 성종5년(1474)이천부사(利川府使) 이세보(李笹珤)가 다시 중건(重建)하였으며
정자 옆 습지에 안흥지(安興池)를 파서 그 한가운데 연꽃을 심고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孰舟)에게
애련정( 愛蓮亭)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정(李婷)(조선9대 성종의 형)서거정(徐巨正) 조위(曺偉)등
많은 시인들은 애련정의 경치를 읊은시를 남겼고 임원준(任元濬)과 김안국(金安國)의
애련정기(愛蓮亭記)와 애련루기(愛蓮樓記)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종 23년(1528)수종 14년(1688) 정조3년(1779)의 기록에는 역대 임금님들의 영릉(英陵)행차길에
이천행궁(利川行宮)에 모무르며 으레 붉은 연꽃이 어우러진 애련정( 愛蓮亭) 을 돌아보았다고 전한다
순종황제 원년(1907)벌떼같이 일어났던 정미의병(丁未義兵)때 일본군(日本軍)에 이를 진압하고자
이천읍 내 483가구를 불태운 충화사건이 있었으니 이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본다
이천시에서는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이천 시민의 의견을 모아 1998년에 애련정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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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길 남천주길
해동지도(海東地圖)에서 보여지는 옛 이천의 모습과 봉화대로
해동지도 이천부의 옛 지도에는 이천읍치를 중심으로
주변의 산세와 도로 하천 등을 그려 넣었으며 이천부터 경계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주요 지형물과 읍치를 중심으로 그려진 비교적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지도의 상단과 측면에 이천의 연혁과 함께 주요 산천에 대한 위치 설명도 수록하였으며
이천읍치에 주변마을의 소록해 놓았습니다
봉화대로는 지도의 북서쪽 광현(廣峴)에서 시작하는데 광주계이십리(廣州界二十里)라는
거리표시와 함께 이 길이 대로(大路)임을 표기해 놓고 있습니다
길은 설봉산과 아리산 사이의 고개를 넘어오게 되는데 고개 이름이 절음현(絶音峴)이고
이 길을 절음현이라 부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개의 서쪽에 고성(古城)은 설봉산성(雪峰山城)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천읍지 앞을 지나 봉화로를 따라 내려오면 안흥제언(安興堤堰)이 있습니다
현재 이천9경중 7번째 명물인 애련정이 있는 연못으로 유명한 안흥지를 의미하는데
1907년 일본인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98년에 이천시가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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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발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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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발역에 도착 봉화길 제5길 걷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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