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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걷다/평화누리길

경기도 김포시)평화누리길,1코스(염하강철책길)14km[25-01-30[목]

평화누리길 :경기도 김포시~경기도 고양특례시~경기도 파주시~연천군 까지 12코스 ( 총 191km )이어걷는 길이다

 

걷기~대명항~덕포진~쇄암리 쉼터~고양리 쉼터~문수산성 남문

대명항~함상공원지나~평화누리길 1길 시작점 10:30~15:50

 

갈때 : 원흥역(3호선)~대곡역(서해선)~김포공항역(김포 골드라인)~구래역
60-3번 버스타고 대명항 종점하차

올때 : 성동검문소 정류장에서 90번~구래역(김포 골드라인)~김포공항역(서해선)~대곡역(3호선)~원흥역

 

잠시 포구에 들러나온다

 
작품명~평화의 노래

 
작품명~바람을 타고

 
전경안내판~덕포진 돈대가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서는 강화의 광성보 용두돈대가 조망된다
각각 해안 안쪽으로 돌출된 지형인 덕포진돈대와 용두돈대 사이의 해엽은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유래하여
손돌목 이라고도 불리는데 강화해엽 중에서 가장 폭이 좁고 물살이 거센 곳이다ㅣ
자연지형을 이용한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전경안내판~덕포진 돈대가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해안 쪽으로 돌출되어
강화의 주요 관방시설들이 한 눈에 조망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는 강화의 초지진 이 보이며
강화의 덕진진 남장포대 와 마주하고 있다 멀리 정족산과 마니산도 보인다

 
손돌목~ 손돌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을때 왼쪽으로 보이는 강이 손돌목이다
손돌목을 안면도 염창동과 함께 난파 위험지역으로 꼽히며 물살이 빠른곳이다
태조 4년(1395)에 조운선 16척 태종3년(1403) 30척 태종 14년(1414) 60척이 침몰한 기록이 있다
손돌은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 할 때 뱃길을 잡은 뱃사공인데
험한 물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그의 목을 베었는데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 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완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

하나뿐인 생명을 잘못도 없는데 목을 베다니~죽은뒤에 후하게 장사를 치른들 무슨 소용이있나

 

덕포진 돈대터~이곳은 덕포진에 속한 돈대의 터다
돈대는 적의 칩입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곳에 보루를 만들고
화포를 비치한 소규모 방어 시설물이다
덕포진은 조선시대 해안지대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진영으로
처음 세워진 시기는 선조 대(재위 1567~1608)로 추정된다
덕포진의 위치는 서해에서 강화만을 거쳐 수도 한성(오늘날 서울)을 침공하려는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또한 병인양요(1866) 때는 프랑스 함대 신미양요(1871) 대는 미국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이기도 하다
1980년 발굴 조사 당시 이곳에서 돈대를 위한 시설의 하부 구조가 확인되었으나
돈대의 설치시기는 알 수 없다
이곳은 해안 쪽으로 돌출된 지형이어서 강화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의 덕진진 남장포대 광성보 용두돈대와 삼각 대형을 이루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제 다시 길을 이어간다

 
이곳에서 점심먹고 쉬어간다

 
원모루나루~원모루는 높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고양포(高陽捕) 입니다
지금도 어업이 이어지고 있는 김포의 몇 안 되는 포구 중 하나로 원포 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말까지 주로 새우를 잡아 파는 작은 포구마을이었습니다
부근에는 원우주막이라는 이름의 주막도 있었으며
일 년 중 첫 출어하는 정월에는 마을 뒷산의
당목에서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곤 했습니다
1895년의 지도에는 뱃길이 보이지 않다가 1919년의 지도를 보면
강화 화도돈대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포구의 역할을 하다가 점차
강화를 오가는 나루의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나루 주변에 공출 창고와 가마니 창고를 두고
쌀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가던 아픈 역사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근대기에는 기선이 정기적으로 정박하게 되면서 마을의 규모가 커졌는데
마을이 번성하였을 때는 가구수가 140여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원래 나루의 위치는 현재의 원모나루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온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기선의 표를 팔던 매표소가 있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김포 평화 정류소(준공일 2021.06.13)
실제 사용되는 정류장은 아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문수산이다
가까운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였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저 다리아래를 지나 오른쪽길로 조금만 가면 된다

 
문수산성~사적 제139호(1964-8-29 지정)
1694년 (숙종 20년에)축성된 문수산성은 강화 갑곶진(甲串鎭) 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다
명칭은 신라 해공왕 (재위 765~780) 때 산 정상에 창건된 문수사(文殊寺) 라는 절에서 유래되었으며
1964년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1866년(고종 3년)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軍)과 일대 격전을 벌이면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었다
해안쪽 성벽은 없어지고마을이 들어섰으며 문수산 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았으나
남문과 북문이 복원되었고 총 6km에 이르는 산성중 4km가 남아있다
또한 문수산 산림욕장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 홍예문을 거쳐 정상에 오르면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 때 창건된 문수사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풍담대사부도 및 비를 만날 수 있다

 

 
문수산 입구 도착~이곳은 다음에 이어걸을 평화누리길 2코스 시작점이다
이제 길 건너서 버스타고 집으로 가자~